Chapter 2: 축구와 국민국(1910년대~1940년대)

— 시민의 여가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 다만 유럽과 중남미 축구단 창단 시기는 19세기 후반인데 이 챕터에 묶어서 서술함, 창단 이후 국민으로 정체성 형성과 연속성 있는 설명 위해서)

Unknown author, Estadio Centenario 1930, 퍼블릭 도메인, 스테디움은 국가 프로젝트·상징 공간이었다. 1983년 7월 18일, 이 경기장은 FIFA에 의해 **"세계 축구의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러한 종류의 건축물로 지정

Organizado por la FIFA, para el cual Uruguay fue escogido como sede.,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의 개관식은 1930년 7월 18일에 거행되었는데, 이는 정확히 우루과이 동방 공화국의 제1차 헌법 100주년을 기념하는 날

Historia del fútbol Uruguay con Juan Pablo, 1929년 7월, 센테나리오 스타디움 건설을 위한 초석이 놓였으며, 다음 달에 착공하여 기록적인 8개월 만에 완공

서론

1930년 7월 30일,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건설된 센테나리오 스타디움(Estadio Centenario). 첫 월드컵 결승전, 우루과이 대 아르헨티나. 경기 시작 전, 스타디움 중앙에 두 나라의 국기가 게양되었다. 9만 3,000명의 관중이 일어섰다. 전반전이 끝날 때 아르헨티나가 2-1로 앞서 있었다. 아르헨티나 관중석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후반전, 우루과이가 3골을 연속으로 넣으며 4-2로 역전했다. 경기가 끝나자 몬테비데오 전역이 들썩였다. 다음 날은 국가 공휴일로 선포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정반대 풍경이 펼쳐졌다. 우루과이 대사관에 돌이 날아들었다. 거리에서는 분노한 군중이 모였다. 이것은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국가 간의 대결이었다.

근대 축구는 처음부터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그것은 챕터 1에서 살펴보았듯 산업도시 노동자의 여가에서 출발해 세계로 확산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점차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다시 말해 축구는 노동자 계급의 여가 → 세계적 확산 → 국가적 상징이라는 세 단계를 거쳐, 사람들이 자신을 인식하고 타자와 경쟁하는 장으로 전환되었다. 이 변화의 핵심은 축구가 더 이상 지역 공동체의 놀이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가 집단 정체성의 중심이 되는 무대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Chapter 1에서 보았듯, 초기의 축구는 산업도시 노동자들의 여가로 태어났다. 그 단위는 국가가 아니라 도시와 지역 공동체였다. 맨체스터와 뉴캐슬, 셰필드와 같은 도시가 곧 정체성이었고, 클럽은 그 정체성을 조직하는 제도였다. 이 시기의 경기는 '우리 동네'와 '저 동네'의 대결이었지,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의 경쟁은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축구는 영국을 넘어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 경로는 제국의 이동 경로와 겹쳐 있었다. 상인과 기술자, 철도 기사와 항만 노동자, 선교사와 해군은 축구공과 규칙을 함께 들고 유럽과 중남미,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향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에서, 제노바의 부두에서, 상하이의 조계지에서 축구는 '영국인의 놀이'로 처음 등장했다. 흥미롭게도 축구는 제국의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 대륙과 중남미의 도시 청년들과 노동자들은 빠르게 이 경기를 받아들였다. 이유는 명확했다. 축구는 특별한 장비나 시설 없이도 할 수 있었고, 규칙이 단순했으며, 무엇보다 산업화와 함께 형성되고 있던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 리듬—정기적 여가, 주말의 자유시간, 공동체 문화—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제국에서 전파된 문화였지만, 축구는 곧 '우리의 경기'가 되었고, 오히려 영국 팀과의 경기에서 이기는 것은 제국에 대항하는 상징적 승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 놀이는 곧 현지의 언어가 된다. 축구가 지닌 리듬과 규칙, 주말의 시간 구조와 클럽이라는 조직 형태는 각 사회의 감각과 빠르게 맞물렸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는 항만 노동자와 학생들이 축구를 받아들였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도시 청년층이 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20세기 초,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축구의 위치는 근본적으로 변한다. 전쟁은 국가가 개인의 삶에 직접 개입하는 사건이었다. 국가의 징병과 동원, 배급과 통제를 거치며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국민'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축구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축구는 더 이상 도시 노동자의 사적인 여가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단위의 집단 정체성과 결합하기 시작한다. 전쟁 이후 국제 경기가 본격화되면서, 경기장에는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國歌)가 연주되었다. 승패는 단순한 스포츠 결과가 아니라 국가의 위신을 가늠하는 사건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축구를 통해 지역을 넘어선 '우리'를 상상하게 되었고, 경기장은 노동자의 놀이 공간에서 국민의 감정이 집결되는 무대로 이동한다.

이 장에서는 축구가 노동자의 여가에서 출발해 세계로 확산되고, 마침내 국민국가의 상징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 변화는 누군가가 설계한 결과라기보다, 세계적 확산과 전쟁, 대중 사회의 형성 속에서 사람들이 축구를 다르게 이해하게 된 역사적 귀결이었다.

1. 축구의 확산 제국 네트워크를 따라

잉글랜드 축구가 유럽과 중남미로 확산된 과정은 단순한 스포츠의 전파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영국의 산업·제국·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생활양식과 규범이 함께 이동한 결과였다. 이렇게 각국으로 확산 과정이 있었기에, 축구는 '도시 노동자의 주말 여가'에서 멈추지 않고, 각 사회 안에서 국민국가의 정체성과 상징으로 재구성될 수 있었다.

세계로 퍼져나간 경로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산업자본주의와 제국 질서가 만들어낸 이동의 경로를 그대로 따랐다. 영국의 상인과 기술자, 철도 기사와 항만 노동자, 해군과 외교관은 각지의 항구와 공사 현장, 조계지에 도착하며 축구를 함께 가져갔다. 제국에서 전파한 것이지만 축구에 내재된 경쟁 규칙, 정기적 여가 패턴, 클럽과 지역사회 중심 문화는 각국의 산업 발전 단계와도 조응하는 것이었고 산업화되던 그 당시 도시 구성원들의 생활감각과도 일치했기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스며들었으며 지역의 언어가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항구 도시와 산업 도시가 축구의 첫 정착지였다. 이들 도시에는 영국 상인과 노동자들이 집중되어 있었고, 국제 교류가 활발해 새로운 문화가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다. 제노바와 토리노, 마르세유와 바르셀로나에서는 영국인 노동자와 상인들이 클럽을 만들었고, 현지 청년들이 그 방식을 모방했다. 처음에는 '영국인들의 놀이'였던 축구는, 곧 도시 청년층과 학생, 노동자들에게 흡수되며 지역의 스포츠가 된다. 일부 엘리트 학교에서 즐기던 스포츠와 달리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국민 국가 정체성 형성의 기반이 다져졌다.

북독일 최대의 함부르크 항구, 1825 - 1925, 퍼블릭 도메인

산업도시 이탈리아 토리노 (Juventus 1897), 01/01/1890, 퍼블릭 도메인

스페인: 1899년 바르셀로나, 스위스·영국계 상인들이 FC Barcelona (1899) 창단

이탈리아: 제노바·토리노 항구 도시에서 영국 선원과 상인들이 축구 전파 → Genoa CFC (1893), Juventus (1897) 창단

독일: 귀국한 유학생들과 체육 교사들이 Fußball 클럽 설립 → Hamburger SV (1887), FC Bayern München (1900) 창단

프랑스: 파리·르아브르 항구를 중심으로 영국인 커뮤니티가 클럽 형성 → Le Havre AC (1872), Paris FC 전신 클럽들 (1890년대) 창단

Unknown author, Buenos Aires harbour c. 1910, 퍼블릭 도메인

Português: Benedito Calixto - Vista de Santos tirada do Morro do Fontana, c. 1892.퍼블릭 도메인

중남미에서도 경로는 비슷했다. 항구도시는 영국 상인과 선원들이 드나드는 관문이었고, 철도 회사 등 영국 자본이 투자한 산업시설에는 영국인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리우데자네이루의 항구에서 축구는 철도 회사와 항만 노동자, 학교를 통해 확산되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초기 클럽들은 영국식 이름과 규칙을 그대로 따랐지만, 그 안에서 형성된 관중과 선수는 곧 현지인이었다. 축구는 제국의 문화로 도착했지만, 이질감 없이 빠르게 '우리의 경기'로 변모했다. 영국인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축구를 통해 공동체의 범위를 인식했고 이런 동질감이 국가 정체성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철도 노동자·상인 → Boca Juniors (1905), River Plate (1901) 창단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항만 → Nacional (1899), Peñarol (1891) 창단

브라질: 상파울루의 영국계 엘리트 학교 → 노동자·이민자 계층으로 확산 → São Paulo FC (1930), Santos FC (1912)

축구의 광범위한 확산은 단순한 스포츠의 이동이 아니다. 축구는 스포츠로서의 완결성과 재미 외에도 당시의 산업 발전단계와 함께 빠르게 확산되던 정기적 여가, 공동체정신, 규칙 준수 등에 대한 시대 감각을 구현하고 있었다. 각 사회의 도시 문화, 계급 구조, 청년 문화와 결합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했다. 영국에서 노동자의 여가였던 축구는, 유럽과 중남미에서는 도시 청년의 정체성과 결합했고, 곧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제국에서 전파되었지만 오히려 축구라는 스포츠 안에서 제국 팀과 경쟁하면서 제국에 대항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로 구축했다.

이 시점에서 축구는 이미 국경을 넘는 언어가 된다. 아직 "국가"를 대표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른 사회들이 동일한 규칙과 형식을 공유하게 되었고, 그 위에서 비교와 경쟁이 가능해졌다. 축구는 국가적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구조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2. 전쟁과 집단 정체성의 재편

제1차 세계대전은 집단 정체성의 측면에서 '국민의 탄생'이라는 사건의 계기가 되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징병과 동원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전세계인들은 국가가 개인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을 경험했다. 그 결과 개인은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인 동시에 국가 단위로 규정되는 존재가 되었다. 여러 국가의 대중들은 스스로를 '국민'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전쟁 이후의 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가 나타났다.

대중은 국가 단위로 조직되었고,

희생과 동원은 집단적 경험이 되었으며,

정치적 정체성은 지역보다 국가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사회적 구성물인 축구 역시 이 변화의 외부에 있지 않았다. 이미 유럽과 중남미 여러 도시로 확산된 축구는, 전쟁을 거치며 각 사회에서 '국가의 언어'로 전환될 조건을 갖추게 된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국민국가를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고 불렀다. 같은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 만난 적이 없지만, 신문을 함께 읽고, 같은 국가(國歌)를 부르며, 같은 상징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라는 집단을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쟁 이후 축구는 바로 이 '상상의 공동체'를 가장 강력하게 작동시키는 장치가 되었다. 경기장에서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연주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국가를 눈앞에서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영국에서 건너간 축구는 파리와 밀라노,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토착민들과 섞여 뿌리를 내렸지만, 전쟁 이후에는 그 지역들마다 '자신의 축구'를 내세우며 국가끼리 경쟁이 펼쳐진다. 이는 문화적 토착화(indigenization)—외래 문화가 현지 문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하는 과정—의 전형적 사례였다.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 노동자들이 축구에 참여하면서 삼바의 리듬과 즉흥성을 담은 드리블 중심의 '지잉가(ginga)' 스타일이 탄생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 지역의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만든 보카 주니어스가 탱고의 감각을 닮은 개인 기술 중심 축구를 발전시켰다. 우루과이는 작은 국가였지만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며 '셀레스테(La Celeste, 하늘색 군단)'라는 별명과 함께 국가적 자긍심의 상징이 되었다. 축구는 제국에서 왔지만, 각 국가는 그것을 자신의 역사와 감각 속에서 새롭게 만들었다.

흥미롭게도 축구는 제국의 문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부되지 않았다. 오히려 현지로 스며들었고, 영국 팀을 이기는 것은 단순한 스포츠 승리가 아니라 제국에 대한 상징적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다. 195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패배한 '마라카낭의 비극'은 국가적 충격이었고, 반대로 1986년 마라도나가 잉글랜드를 꺾은 경기는 포클랜드 전쟁 패배 이후 아르헨티나의 상처를 치유하는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국가 간 대항전인 국제 경기에서 국기가 등장하고, 국가(anthem)가 연주되며, '우리'와 '그들'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승패는 더 이상 단순한 스포츠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선수와 관중들이 경험한 경기의 순간도 개인이 자신을 국민으로 인식하는 장면이 되었다. 클럽이 아닌 자신이 속한 국가를 응원했다. 축구는 전쟁 이후의 세계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국가라는 추상적 공동체를 눈앞에 보이게 만드는 언어가 되었다.

3. 대표팀과 국제대회의 제도화

3-1. 국가대표팀의 부상

국가 간 축구 경기는 19세기 말부터 존재했지만, 그 사회적 의미가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전쟁 이후다. 대표팀은 국가를 상징하는 공식 주체가 되었고, 국제 경기는 외교적·상징적 의미를 띠기 시작했으며, 승패는 개인적 기쁨을 넘어 국가 공동체의 집단적 감정으로 경험되었다. 대표팀은 축구를 통해 국가를 가시화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클럽이 도시를 대표하던 시대에서, 대표팀은 국가를 대표하는 형식이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 도시가 이겼다"고만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겼다"는 말 속에서, '우리'는 점점 국가를 의미하게 되었다.

1930 WORLD CUP FINAL, 우루과이 월드컵 결승

World Cup 1930, 우루과이 월드컵 결승

Estadio Centenario in Montevideo, Uruguay

Uruguay supporters celebrating their first World Cup won. 30/07/1930, El Gráfico, 퍼블릭 도메인

Uruguay players celebrating the win over Argentina. 30/07/1930, El Gráfico, 퍼블릭 도메인

3-2. 월드컵의 탄생 — 축구씬의 가장 큰 아이러니, 영국의 아웃사이더 행

1930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첫 월드컵은 축구를 처음으로 전면적인 국가 vs 국가의 무대로 만들었다. 올림픽이라는 국가 간 거대한 스포츠 경쟁 무대가 이미 존재했지만, 올림픽은 아마추어만 출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미 프로화된 수준을 갖춘 축구계의 기대를 채울 수 없었다. 현실과 괴리된 이런 제도 대신 FIFA를 중심으로 월드컵이 개최되었고, 주도국은 프랑스와 중남미였다.

첫 개최국이 우루과이가 된 이유는 명확했다. 우루과이는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 금메달을 통해 세계 최강팀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1930년은 우루과이 독립 100주년이었다. 우루과이 정부는 모든 참가국의 항공·선박 비용을 부담하고 대형 국립 경기장(Centenario Stadium)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고, FIFA는 이를 받아들였다. '작은 남미 국가가 세계를 초대하는' 전례 없는 국제 스포츠 이벤트가 승인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축구 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이 펼쳐진다. 축구 종주국이던 영국이 정작 축구 제도적 세계화의 핵심이 되는 기구인 FIFA에서 탈퇴하고 월드컵에 불참을 선언한 것이다. 표면적 이유는 영국 FA가 표방하는 '축구 아마추어리즘'과 FIFA나 월드컵이 표방하는 '프로화'가 충돌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 내에도 이미 프로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을 볼 때, 실제 이유는 프랑스와 중남미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FIFA 질서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은 1920년 FIFA를 탈퇴했고, 1928년 완전 탈퇴하여 국제 대회에 불참했다. 따라서 1930년 월드컵 당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모두 FIFA 비회원이었다. 그 결과 축구의 '기원'은 영국이었으나 월드컵이라는 축구의 '제도적 체제'는 프랑스–유럽 대륙–남미가 구축하게 되었다. 이렇게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정치와 경제 이슈가 복잡하게 얽혀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월드컵 이전까지 축구가 주로 지역과 도시의 정체성을 조직했다면, 월드컵이 등장한 시점부터 축구는 국가 단위의 감정을 동원하는 제도가 된다. 선수들은 클럽이 아니라 각자 국가의 대표로 출전했다. 이 당시 축구는 아직 완전히 상업화되지 않았다. 방송 중계는 제한적이었고, 클럽은 여전히 지역 기반을 유지했으며, 선수는 지역 사회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축구는 월드컵이라는 세계적 스포츠 이벤트를 통해 이미 국가 간 대결이라는 공적 의미를 지닌 정치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월드컵은 이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고 있던 국가적 의미를 집약해 보여준 무대였다.

Italian Salute, 1934 이탈리아 월드컵

1934 FIFA World Cup final, Italy national football team celebrating the FIFA World Cup, , public domain

Empicc, Soccer - World Cup France 1938, 26 June 1938, Alamy,

, Available for Editorial use only, This image could have imperfections as it’s either historical or reportage.

The victorious Italy team with dictator Benito Mussolini (back row, c), including Giuseppe Meazza (sixth from right).

Finale de la Coupe du monde de football de 1938,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헝가리를 4대 2로 꺽고 우승

1954 FIFA World Cup final, 독일이 헝가리 3대 2로 꺾고 우승

1954년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 서독 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한 역사적인 순간, 1954년 7월 4일 스위스 베른의 방크도르프 경기장, 베른의 기적: 서독은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헝가리를 상대로 3-2 역전승을 거두며 첫 월드컵 우승을 달성, 독일의 영웅: 이 우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이던 독일 국민들에게 큰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4. 권위주의 국가와 축구의 정치화

4-1. 파시즘 체제와 축구

1차대전 전후로 유럽에는 파시즘이 팽배했다. 파시즘(Fascism)이란 20세기 초 유럽에서 등장한 정치 이데올로기이자 통치 방식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다.

국가 절대주의 -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한다. 국가는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되며, 개인은 그 일부일 뿐이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고가 기본 전제다.

강한 민족주의와 집단 동일시 - 민족·국가의 단일성과 순수성을 강조한다. 내부의 다양성(계급, 종교, 소수자)은 분열로 간주되며, 통합을 방해하는 요소는 제거 대상이 된다.

권위주의·동원 정치 - 의회 민주주의, 자유주의, 다원주의를 부정한다. 강력한 지도자와 일당 체제를 통해 사회 전체를 "국가 목표"에 동원한다. 선전, 의식, 상징, 대중 집회가 중요한 정치 수단이 된다.

이 시기 축구계에는 파시즘적 국가 이데올로기가 직접 개입했다.

1) 이탈리아 – 파시즘과 월드컵 (1934, 1938)

무솔리니 정권은 축구를 명백히 국가 선전 도구로 사용했다. 1934년 월드컵을 이탈리아에서 개최했고, 국가가 직접 경기 운영에 개입해서 심판 압박, 정치적 메시지, 군사 퍼레이드와 결합을 시도했다.

무솔리니의 유명한 발언: "이탈리아는 축구에서도 제국이 되어야 한다."

이탈리아 대표팀은 단순한 스포츠 팀이 아니라 파시스트 국가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도구였다. 선수들은 클럽 선수이기 이전에 이탈리아의 군인에 가까운 위치에 놓였다. 실제로 많은 축구 선수들이 전쟁에 징집되어 전장으로 나갔다. 그들은 경기장에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였지만, 전쟁터에서는 국가를 위해 싸우는 군인이었다. 선수와 국민, 그리고 군인이라는 정체성은 분리되지 않았다.

2) 독일 – 민족 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상징

나치 독일은 스포츠를 게르만 민족의 신체적·도덕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보았다. 유대인 선수와 임원을 축출하고 클럽 구조를 국가 체제에 맞게 재편했으며, 대표팀은 '민족 공동체의 얼굴'로 상징되었다. 독일 대표팀은 스포츠 팀이 아니라 인종적·국가적 정체성의 구현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의 수많은 축구 선수들도 전선으로 동원되었다. 그들은 평시에는 경기장에서 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했지만, 전시에는 전장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축구 선수라는 직업은 국민으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의 의무로부터 면제되지 않았다.

3) 오스트리아 "Wunderteam" (1930–32)

전간기 오스트리아는 작은 국가였지만 대표팀은 유럽 최강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파시즘 정권은 '작은 국가도 문화적으로 위대할 수 있다'는 상징으로 활용했다. 예술적 축구를 오스트리아 정체성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은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 그 자체였다.

4) 클럽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팀이 된 사례

특히 전체주의 체제에서, 클럽은 사실상 국가 기관이 되었다.

  • Dynamo Moscow – 소련 내무부(KGB) 소속

  • CSKA Moscow – 군 소속

  • Real Madrid (프랑코 체제 하) – 중앙국가의 상징

  • Red Star Belgrade / Partizan – 국가 기관 기반

이 클럽들은 지역 클럽이면서 동시에 국가 체제의 얼굴이었다. 따라서 '클럽 vs 클럽' 경기는 사실상 '체제 vs 체제'의 경쟁을 의미했다. 1차 대전을 전후로 국가라는 행위자가 부각되면서 축구는 대중의 감정을 조직하는 도구가 되었다. 경기의 결과는 단순한 승부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국가 체제의 우월성과 민족의 힘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4-2. 정치 체제를 넘어선 국가 정체성

이러한 변화는 파시즘 국가의 독재 체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국가라는 행위자는 세계 정치무대의 중요 행위자였고, 당시 시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삶을 조직했다. 정치 체제와 무관하게, 국제 경기의 승리는 "국가의 위상"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해석되었고, 패배는 집단적 실망으로 경험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도 축구는 국가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미국에 0-1로 패배한 사건은 단순한 스포츠 결과를 넘어 '제국의 쇠퇴'를 상징하는 국가적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1938년 월드컵 준우승은 프랑스 국민에게 자긍심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정치적 불안과 경제 위기 속에서 대표팀의 성과는 프랑스가 여전히 '위대한 국가'임을 증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정부는 선수들을 영웅으로 칭송했고, 언론은 이를 국가적 쾌거로 보도했다.

우루과이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었다. 1930년 첫 월드컵 우승과 1950년 브라질 마라카낭에서의 우승은 인구 200만의 작은 국가가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특히 1950년 우승은 우루과이 국민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고, '우리는 작지만 위대하다'는 집단 서사를 만들어냈다.

축구는 점차 국가 감정을 표현하는 공적 무대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축구를 통해, 정치 연설이나 교과서가 아니라 감정의 차원에서 국가를 경험했다. 경기장은 시민의 여가 공간이면서 동시에,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체화되는 장소가 되었다.

5. 지역 공동체에서 국가 공동체로

이러한 변화는 축구의 주체가 인식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Chapter 1에서 축구의 주체는 지역 공동체였다. 맨체스터와 뉴캐슬, 리버풀과 셰필드. 사람들은 같은 도시에 거주하고, 같은 산업 구조 속에서 살아가며, 같은 거리와 공장을 공유했다. 그들은 노동자이자 이웃이었고, 축구는 그들의 지역 생활 세계 안에 존재했다.

그러나 국민국가 단계에서 축구의 주체는 '지역'이 아니라 '국가'가 된다. 관중은 더 이상 "맨체스터 사람"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잉글랜드인", "이탈리아인", "독일인"으로 호명된다. 지역 정체성보다 국가 정체성이 앞서게 된 것이다.

축구는 일상의 제도이자 동시에 국가를 상상하는 장치가 된다. 이 시기의 축구는 여전히 대중적이며, 여전히 노동계급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달라졌다.

축구는 개인의 여가를 넘어서 국가의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는 공적 장치가 되었고, 생생한 승부와 열광 속에서 국가라는 추상적 공동체를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되었다.

6. 이 단계의 축구는 무엇이었는가.

국민국가 단계의 축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가 국가 정체성의 무대였다.

유럽에서 축구는 전쟁과 재건이라는 격동 속에서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고, 확인하며, 공고히 하는 장이었다. 패전국은 축구를 통해 국가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고, 승전국은 우월성을 재확인하려 했다. 중남미에서 축구는 유럽 제국으로부터의 문화적 독립과 자국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국가를 상상하고, 그 상상을 집단적으로 경험하며, 내면화하는 무대가 되었다. 작은 국가들은 경기장에서의 승리를 통해 세계 무대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선수들은 국기를 가슴에 달았고, 관중은 승리에 환호하고 패배에 침묵했다. 사람들은 축구를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경험했다.

20세기 초반 전쟁을 전후로 벌어진 국가 단위의 축구 경기들, 월드컵이라는 이벤트의 탄생, 그리고 각국의 정치적 활용을 고려했을 때, 이 시기의 축구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국가 단위로 감정이 조직되는 무대

  • 국민이 "우리"를 경험하는 집합적 공간

  • 정치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공적 제도

즉, 이 시기의 축구는 지역 공동체의 여가에서 국가 공동체의 상징으로 이동한 스포츠였다. 프로화되기는 했지만 아직 그 자체로 산업화되고 상업화되기 전 단계, 그래서 다음 도약을 준비하는 단계였다.

결론

Chapter 1에서 축구는 산업사회 노동자들의 집단적 여가 제도였다. Chapter 2에서 축구는 국가가 자신을 표현하고, 국민이 국가에 속해 있음을 체감하는 정치적·상징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 변화는 우연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국가는 개인의 삶에 직접 개입하는 행위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국민'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축구는 바로 이 '상상의 공동체'를 가장 강력하게 작동시키는 장치가 되었다. 월드컵이 탄생하고, 파시즘 국가들이 축구를 정치 선전에 활용했으며, 국제 경기에서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國歌)가 연주되었다. 선수들은 국가를 대표했고, 관중은 승리에 환호하고 패배에 침묵했다.

축구는 여전히 공을 차는 놀이였지만, 이제 그것은 지역 공동체의 여가에서 국가 공동체의 상징으로 이동한 스포츠가 되었다. 이 변화는 이후 축구가 복지국가의 대중 스포츠로,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의 글로벌 산업으로 전환되는 토대가 된다.

BOX: 월드컵의 제도화 과정 (1904-1954) — 그리고 왜 여전히 월드컵인가

2022년 12월 18일,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 메시는 37세였다. 클럽에서 이미 모든 것을 이뤘지만, 월드컵 트로피만은 없었다. 경기가 끝나고 메시가 트로피를 들어 올렸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는 수백만 명으로 넘쳐났다. 대통령은 공휴일을 선포했다. 메시는 "이제 완성되었다"고 말했다.

왜 월드컵인가? EPL과 챔피언스리그가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를 보여주고, 클럽 축구가 상시적으로 관심을 받는 시대에도, 월드컵은 여전히 특별하다. 그 이유는 1930년, 월드컵이 탄생한 순간부터 각인된 성격 때문이다.

1. 1904년 FIFA 창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주도로 FIFA가 창설되었다. 프랑스 출신 줄 리메(Jules Rimet)는 1921년 FIFA 회장에 취임하면서 축구를 '국제적 시민 종교'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올림픽과 별도로 프로도 참여 가능한 완전한 국제 대회를 구상했다. 이것이 월드컵의 직접적 기획 동기였다.

2.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첫 월드컵 개최국은 우루과이였다 (1924·1928 올림픽 금메달, 독립 100주년). 우루과이 정부는 모든 참가국의 항공·선박 비용을 부담하고 대형 국립 경기장(Centenario Stadium)을 건설했다. 개막식에는 각국의 국기가 등장했다. 참가국이 13개에 불과했지만 국가 단위 참가는 명확했다. 이 순간 축구는 유럽 중심 질서를 벗어나 비유럽 국가가 세계를 조직하는 무대가 되었다.

3. 1954년 스위스 월드컵 - 국가 의례의 표준화

월드컵이 진정한 '국가 의례' 형식을 갖춘 것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부터였다. FIFA가 경기 전 양국 국가(國歌) 연주, 국기 게양, 대표팀 공식 입장을 사실상 표준화했다. 이때부터 국가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호출되었다.

월드컵은 국가가 국제 무대의 중요 행위자임을 각인시키는 장소가 되었고, 국민이 "우리"라는 집단을 감정적으로 체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군사·외교가 아닌, 문화로 이루어지는 국제 경쟁이었다.

4. 역사적 의미

월드컵은 축구를 '산업도시의 여가'에서 '국민국가의 상징 체계'로 전환시킨 결정적 행사였다.

왜 지금도 월드컵은 특별한가

EPL이나 챔피언스리그는 유럽 최고 수준의 축구를 보여준다. 하지만 월드컵은 4년에 한 번뿐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선수들은 월드컵의 시간에는 팀의 선수가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이 된다. 메시는 바르셀로나 선수가 아니라 아르헨티나 사람이 되고, 음바페는 PSG가 아니라 프랑스를 대표한다.

월드컵과 국가 정체성의 관계는 20세기 초반만큼 밀접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글로벌 클럽 축구에 익숙하고, 축구는 금융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월드컵이 시작되면, 우리는 "대한민국", "브라질", "독일"이라는 단어를 외친다. 거리는 국기로 뒤덮이고, 사람들은 함께 모여 경기를 본다.

축구의 성격은 많이 바뀌었지만, 월드컵은 여전히 1930년 우루과이에서 시작된 그 역할을 일부 담당한다. 국가 단합과 정체성 확인의 무대. 우리가 "우리"라는 집단을 감정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것이 월드컵이 여전히 특별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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